애월면 소길리는 중산간 마을 중에서도 오지로 4.3 시기에는 100여 가호 규모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이 외진 마을에도 4.3의 광풍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소길리에서는 1948년 5월 초, 몸이 아파 집에 누워있던 고순흠이 다른 경찰 가족 그림과 함께 무장대에 납치된 뒤 장전리 포제동산에서 피살된 것을 시작으로 한국전쟁 이후까지 무장대와 토벌대에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소길리에는 1948년 11월 중순께 소개령이 내려졌다. 이틀 내에 모두 해안마을로 내려가라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각자의 연고지에 따라 해안마을로 소개했고, 일부 청년들은 토벌대가 무서워 소개하지 않고 마을 주변을 떠돌았다. 다음은 소개령이 내려지기 이전까지 소길리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1948년 5월 7일: 고순흠(19,남)과 경찰가족 2명 등 3명이 무장대에 납치된 뒤 장전리에서 피살됨
*1948년 6월 27일: 진기선(17,남)이 신엄지서 경찰에 연행된 뒤 파군봉에서 총살된 6월 30일: 백윤심(27. 남)이 고성리 밭에 일하러 갔다가 무장대에 피살됨 10월 17일: 박창화(59) 박승림 (18) 부자는 수산리에 거주하다 무장대의 권유로 원동으로 피신했는데 원동을 급습한 군인에게 총살됨
*1948년11월 13일: 토벌대가 원동 마을에서 소길리 및 주변 마을 주민 50~60명을 학살함
소길리 주민들은 그 후에도 해안마을로 소개한 사람들은 해안마을 소개지여서, 그렇지 못해 마을 주변을 헤매던 사람들은 산야에서 한 사람 두 사람 희생됐다. 그 시작은 진부인 가족으로 11월 15일, 진문규(67, 남, 진부인 부친)와 강화출(31. 여, 진부인 처)이 진부인을 찾아다느니라 소개하지 못해 마을을 떠돌다 토벌대에 발각돼 총살됐다.
1 949년 봄, 소길리 주민들은 장전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2~3개월 살았다. 그러던 그해 가을, 당시 구장이었던 고기의 노력으로 마을 복구를 허가받았다. 소길리에 4.3성을 쌓는 데에는 주변 고내리와 신엄리 등지의 주민들이 협조해주었다.
한편, 소길 마을에서 가장 혹독한 희생을 치른 것은 원동에 살던 주민들이었다. 1948년 11월 13일, 토벌대는 원동 주민들과 원동을 지나가던 행인들을 합해 50~60명을 무차별 총살하고 모든 가옥을 불태웠다. 그 후 원동은 잃어버린 마을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원동은 1990년대 초반, 당시 살아남은 유족들이 조상의 땅을 되찾기 위해 소송을 벌여 일부 승소하며 우리에게 4.3의 현실적 과제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기도 했다. 현재 원동 학살사건 희생자로 확인된 사람은 8개 마을 42명이다. (소길리 - 잃어버린 마을-원동, 참조)
현재까지 소길리 4.3 희생자로 정부가 인정한 사람은 76명(남성 61명, 여성 15명)이다.
애월면 소길리는 중산간 마을 중에서도 오지로 4.3 시기에는 100여 가호 규모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이 외진 마을에도 4.3의 광풍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소길리에서는 1948년 5월 초, 몸이 아파 집에 누워있던 고순흠이 다른 경찰 가족 그림과 함께 무장대에 납치된 뒤 장전리 포제동산에서 피살된 것을 시작으로 한국전쟁 이후까지 무장대와 토벌대에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소길리에는 1948년 11월 중순께 소개령이 내려졌다. 이틀 내에 모두 해안마을로 내려가라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각자의 연고지에 따라 해안마을로 소개했고, 일부 청년들은 토벌대가 무서워 소개하지 않고 마을 주변을 떠돌았다. 다음은 소개령이 내려지기 이전까지 소길리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1948년 5월 7일: 고순흠(19,남)과 경찰가족 2명 등 3명이 무장대에 납치된 뒤 장전리에서 피살됨
*1948년 6월 27일: 진기선(17,남)이 신엄지서 경찰에 연행된 뒤 파군봉에서 총살된 6월 30일: 백윤심(27. 남)이 고성리 밭에 일하러 갔다가 무장대에 피살됨 10월 17일: 박창화(59) 박승림 (18) 부자는 수산리에 거주하다 무장대의 권유로 원동으로 피신했는데 원동을 급습한 군인에게 총살됨
*1948년11월 13일: 토벌대가 원동 마을에서 소길리 및 주변 마을 주민 50~60명을 학살함
소길리 주민들은 그 후에도 해안마을로 소개한 사람들은 해안마을 소개지여서, 그렇지 못해 마을 주변을 헤매던 사람들은 산야에서 한 사람 두 사람 희생됐다. 그 시작은 진부인 가족으로 11월 15일, 진문규(67, 남, 진부인 부친)와 강화출(31. 여, 진부인 처)이 진부인을 찾아다느니라 소개하지 못해 마을을 떠돌다 토벌대에 발각돼 총살됐다.
1 949년 봄, 소길리 주민들은 장전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2~3개월 살았다. 그러던 그해 가을, 당시 구장이었던 고기의 노력으로 마을 복구를 허가받았다. 소길리에 4.3성을 쌓는 데에는 주변 고내리와 신엄리 등지의 주민들이 협조해주었다.
한편, 소길 마을에서 가장 혹독한 희생을 치른 것은 원동에 살던 주민들이었다. 1948년 11월 13일, 토벌대는 원동 주민들과 원동을 지나가던 행인들을 합해 50~60명을 무차별 총살하고 모든 가옥을 불태웠다. 그 후 원동은 잃어버린 마을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원동은 1990년대 초반, 당시 살아남은 유족들이 조상의 땅을 되찾기 위해 소송을 벌여 일부 승소하며 우리에게 4.3의 현실적 과제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기도 했다. 현재 원동 학살사건 희생자로 확인된 사람은 8개 마을 42명이다. (소길리 - 잃어버린 마을-원동, 참조)
현재까지 소길리 4.3 희생자로 정부가 인정한 사람은 76명(남성 61명, 여성 15명)이다.